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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래 효성 명예회장 별세…

10 BILLION RICH 2024. 3. 30. 00:28

해방 이후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해 온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29일 별세했다. 향년 89. 고인은 효성그룹 창업주 2세로 사돈 관계인 이명박 대통령 재임 때인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연합회) 회장(31·32대)을 지냈다. 1960~1990년대 한국 산업의 급속한 성장기를 거치며 한때 효성그룹을 재계 10위권까지 끌어올렸으나 1990년대 말 외환위기로 부도 위기를 겪을 정도로 사세가 기운 뒤 이명박 정부 때 전경련 회장에 오르며 재도약을 꿈꾸기도 했다. 말년에는 세 아들 간 ‘왕자의 난’을 지켜봤다. 경영에서 손을 뗀 지는 7년 여가 지났다.

1935년 경상남도 함안 태생이다. 경기고 3학년 재학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1959년 일본 와세다대 이공학부를 마쳤다. 다시 도미해 미 일리노이 공과대 석사를 마쳤다. 그의 이런 이력은 창업세대 혹은 창업주 2세 중에선 드문 편이다. 공학 석사를 취득한 뒤 귀국해 아버지 조홍제 효성 창업주가 세운 동양나이론주식회사에 입사했다. 관리부장이 효성그룹 내 첫 직책이었다. 당시 고인의 나이는 불과 26살이었다.

한 해 뒤 고인은 이 회사 건설본부장이 되어 울산공장 건설을 도맡았다. 1970년 동양나이론이 한일나이론을 인수하면서 고인은 대표이사에 오르며 본격 경영에 나섰다.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 4년 만이었다.

효성그룹은 한국 경제 고도성장기 속에 빠르게 성장했다. 고인은 공학 전공자로서 기술 확보에 공을 들이면서도 시장 변화에 민감했다고 한다. 효성그룹이 펴낸 사사 ‘효성 40년 사’를 보면, 1971년 동양나이론 기술연구소 설립과 1973년 동양나이론 자회사 토프론 출범을 통한 페트병 생산은 빠르게 개선된 소득 수준에 따라 생활 습관이 변화하며 일회용품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고인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인은 이런 공을 인정받아 1974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효성 중흥기 이끌어
국제 감각 뛰어난 실무형 총수
이명박 정부 때 전경련 회장으로 재도약 꿈꿔

조홍제(1906~1984) 창업주의 회고록에는 아들인 고인에 대한 일화도 담겨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섬유산업을 넘어 효성이 다른 분야로 사업군을 넓히게 된 건 고인의 제안 때문이라고 한다. 1975년 고인은 아버지에게 한영공업 인수를 제안한 뒤 성사시켰으며, 1981년엔 765㎸ 초고압 변압기를 최초 개발한 효성중공업을 이끌었다.

고인은 효성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1970~8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증가에 힘입어 효성의 주력 분야인 섬유 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한 덕택이다. 1984년 영국 사우 드지가 선정한 ‘개발도상국 500대 기업’ 중 42위에 올랐다. 당시 500대 기업 중엔 한국에서는 효성과 함께 삼성·엘지(LG)·현대 등 11개 기업만 포함됐다. 1983년 24개 계열사를 합병·매각하며 한차례 모습을 바꾼 효성그룹은 금융자동화기기(1983)와 카펫 생산, 종합타이어보강재(1985), 데이터시스템(1986) 등으로 사업을 넓혀갔다. 1990년대 들어 계열사는 더욱 늘었다. 주요 재벌그룹 성장사와 엇비슷하게 문어발식 확장이 효성에서도 진행된 셈이다. 이런 확장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심각한 리스크로 떠올랐다. 증권가 정보지엔 효성 계열사들의 연쇄 부도설이 연이어 올랐다. 효성그룹은 외환위기 이후 3년 동안 효성 바스프, 효성 에이비비(ABB) 등을 해외에 매각하며 유동성 위기를 간신히 버텨냈다. 효성물산·중공업 등 계열사 4곳을 합쳐 ㈜효성을 설립한 것도 1998년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구조 개편이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날 “고인은 기술 중시 경영의 선구자로서 우리나라 섬유, 화학, 중공업 등 기간산업 발전에 초석을 놓았고, 미국·일본과의 민간 외교에도 적극 앞장서며 한국 경제의 지평을 넓히고 한국 경제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